EXPERIENCE

Red Rock Bouldering #1

Friday, December 9, 2022

프롤로그

특정 스포츠에 빠져있는 동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의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클라이밍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글로벌에서 유명한, 이른바 월드 클래스 선수들의 영상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 등반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던 것 같다. ‘저 나라는 한국보다 암장도 훨씬 크네’, ‘IFSC 경기 말고도 다른 경기도 많이 열리는구나’라며 눈이 트이게 됐다. 예전과는 다르게 유튜브나 비메오 같은 비디오 플랫폼을 통한 간접 경험이 잦아지면서 한국에서만 클라이밍을 하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갈망은 커져갔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해외를 나가려고 노력했다. 태국의 크라비도 다녀왔고 가까워서 만만했던 일본만 해도 7번 정도 다녀왔다. 일본의 경우 처음에는 암장 투어나 대회 출전 정도만 했었지만 바위 클라이밍에 빠진 후로는 미타케, 미즈가키, 오가와야마, 도요타 같은 자연 볼더링 위주의 여행을 했다. 그렇게 아시아만 다녀도 가슴이 뛰었고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다짐과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많은 성장을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아직 가보지 못한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갈증은 깊어져갔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도 있었지만 시간을 맞춰 함께 갈 친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 않나 싶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회사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렇기에 이번 미국 등반의 기회는 정말 소중했다. 가게 된 곳은 네바다주의 남쪽에 있는 레드락 캐니언 지역으로 붉은 바위 산이 인상적인 곳이다. 그곳 바위는 사암(Sandstone)이라 대부분 화강암(Granite)인 한국 바위보다는 손이 덜 아프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크기가 거대하니 하이볼도 많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 네 명으로 이루어진 멤버(중간에 LA에 거주 중인 친구 한 명이 잠깐 합류할 예정) 들과 11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흘 동안의 여행은, 비록 먼 미국까지 가는 것에 비하면 짧은 여정이지만 그만큼 알찼다. 밥 먹고 자고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등반뿐이었고 체력 조절을 위해 휴식 등반을 하는 날은 저녁에 생긴 여유 시간에 쇼핑을 하는 정도였다. 이 여정의 이야기는 이번 편을 포함해 총 3편으로 나눠서 써볼 예정이다. 적은 편성이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은 생략하겠다.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

이현동

클라이밍 10년 차

나이: 32
레드락 한 번 가본 적 있음
삼성맨
행동 대장

조선교

클라이밍 9년 차

나이: 32
호주 유학파
핸드워크 스태프
응원 단장

이정록

클라이밍 10년 차

나이: 29
캐나다 유학파
COZYBLACK

김형준

클라이밍 7년 차

나이: 23
LA 거주 중
여행 중간에 잠시 합류
ZIPU RAWKEY

한국 11일 금요일

금요일이라 오후 반차로 퇴근 후 공항에 오후 3시쯤 도착했다. 크래시 패드를 위탁 수하물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사이즈가 수하물 기준을 조금 초과하긴 했다. 하지만 이전에 같은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패드 위탁에 성공했다던 현동 군의 말처럼 이번에도 문제없이 잘 통과됐다. 우리는 직항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번 환승하는 일정인데 맨 뒤의 창가 자리라 화장실도 맘대로 갈 수 있어 너무 편했다. 샌프란까지 11시간 정도 비행하는데 첫 번째 기내식은 패스하고 잠만 잤다. 오래 자고 일어나니 창문 밖은 평화로웠다.

샌프란 도착 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또 하나의 관문인,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의 입국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 심사는 대략 이런 흐름이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1시간이 조금 지나 드디어 도착했다. 이곳은 한국보다 17시간이 느려서 11일 오후 3시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서둘러 수하물을 찾고 렌터카를 빌린 뒤 숙소 체크인 전 인앤아웃버거에 들러 끼니를 해결했다. 체크인 후 어서 빨리 레드락을 느끼고 싶어 크래프트 볼더 지역으로 향했다.

등반 일지 - 11일 금요일

크래프트는 레드락에서 가장 대중적인 에어리어 같았다. 주차장에서 5분 정도만 가면 등반이 가능하고 볼더 간 어프로치가 쉬워 접근성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밤 9시가 넘는 시간에 갔는데도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있었고 멀리서 볼더링을 하는 무리가 보였다. 어떤 볼더를 할지 결정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가이드북에서 급하게 찾아 가까이 있는 Kraft Dinner 볼더로 갔다. V7부터 V11까지 여러 루트가 있었고 V7인 Kraft Dinner, Right부터 시작했다. 물론 평소에는 워밍업으로 V7을 하지는 않는데 이날은 시간이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가락과 몸이 풀리지 않아 조금 오래 걸려 10회 이상 시도했던 것 같다. 베타 찾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미국의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레드락의 등반지 대부분은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튜브 같은 인터넷으로 베타를 참고할 수가 없다. 등반 전 숙소에서 공부를 하거나 녹화를 해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모든 루트를 다 하기도 어려워 보통 V9 이상 위주로 찾아봤다. 물론 이것도 다음 날 어디를 갈지 계획해야 가능하다. 등반지에서 통신이 터지지 않는 덕분에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돼 온전히 등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샜는데 다시 돌아와 Kraft Dinner, Right의 크럭스는, 멀리 있는 컷이 없는 게스톤 홀드를 밀면서 발을 바꿔 밸런스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뒤 그다음 인컷 홀드를 잡는 것이다. 이 과정을 굉장히 신중하게 해야 하는 루트였는데 나중에 숙소에서 영상을 찾아보니 왼손 게스톤에서 크로스가 아닌 왼손을 한 번 더 범프(Bump) 하는 베타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느꼈지만 미국 클라이머들의 영상을 참고할 때는 항상 그들의 키와 암스팬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꽉 차 보인다면 그것은 보통 동양인의 길이로는 할 수 없는 동작이다. 이 루트의 왼손 범프도 같은 맥락이었으며, 솔직히 우리도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들보다는 과감해야 했다.

그 후 바로 오른쪽에 있는 루트인 500$(V8)를 시도했다. 시작은 Kraft Dinner, Right와 같은데 중간부터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마지막 동작이 엄청 크게 런지를 해야 해서 패드가 많아도 무서울 것 같아 현동 군과 선교 군만 시도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현동 군이 완등했다. 선교 군은 열심히 던지다 포기했다.

그동안 나와 정록 군은 Kraft Dinner(V7)를 시도했는데 가이드북의 설명에 Tricky Beta라고 쓰여있는 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단 처음에 루프에서 나오는 동작은 암스팬이 조금 벅차 쉽지 않았다. 그 후 페이스로 진입하면서 루프 안에 있는 하반신의 스윙을 컨트롤하는 것이 포인트 같았다. 하지만 부분 동작으로 해봐도 페이스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Tricky 함에 당하고 숙소로 돌아가서 정답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Angel Dyno 볼더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조금 쉬운 Angel Dyno 볼더로 이동했다. 아마 여기가 크래프트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볼더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바로 Angel Dyno(V6/8)라는 루트 때문인데, 매우 안 좋은 오른손 홀드를 잡고 과감하게 왼손 크로스 런지를 해야 해서 굉장히 다이나믹한 것이 특징이다. 그레이드는 가이드북 설명에 의하면 키가 큰 사람은 V6, 작으면 V8이라고 되어있다. 작을수록 과감하게 몸을 던져야 해서일까? 시작부터 크럭스 동작 전까지는 V0 정도이며 크럭스 후 탑 아웃까지도 V1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영상으로 봤을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그 오른손 홀드를 잡아보니 동작을 하기는커녕 몸이 굳어버렸다. 그다음 홀드 역시 좋지 않아 보였다. 컷이 없는 면 홀드라 방향이 맞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과감히 던졌을 때 양손 다 놓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단 동작을 해 다음 홀드를 만져보니 좋지는 않았지만 버틸만했다. 나는 확실히 미국인 남성에 비해 작은 편이라 오른발 홀드도 높은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5번 정도 시도했을까? 왼손이 버텼다는 느낌을 받았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오른손을 뻗어 크럭스를 통과했다.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마치 아래에 매트가 넓게 깔린 실내 암장에서 하던 동작이었다. 이래서 이 루트가 유명하구나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그렇게 모두 기분 좋게 완등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Progressive Guy(V10)라는 루트를 도전했다. 이 여행을 계획할 당시 V10이 넘는 것을 찾는 도중 발견한 루트인데, 예전에 사솔 선수가 방문했을 때 완등했던 것을 본 기억이 나서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사솔 선수의 강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칸테 쪽 슬로퍼 홀드를 컨트롤하지 못했고 그렇게 크럭스 동작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날의 등반이 끝났다.

Progressive Guy - V10, 클라이머 이현동

늦은 시간이라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한 번 더 인앤아웃버거를 방문했다.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경찰이 오더니 매장 내 모든 손님을 밖으로 내보내서 얼떨결에 밖으로 나왔는데, 밖에는 경찰차 몇 대 와 하늘에는 드론과 헬기가 떠 있었다. 그 후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어떤 한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는 수갑을 채워 나왔고 그제야 우리는 다시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10대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에게 말하길, 본인 너무 깜짝 놀라 손에 케첩을 찍어버렸다나 뭐라나… 우리 말로 소위 지렸다는 뉘앙스였다.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우리가 다 먹고 나간 후에도 경찰차와 체포당한 사람은 밖에 있었다. 그렇게 첫날부터 스펙터클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등반 일지 - 12일 토요일

이날은 라스베이거스에 하나뿐인 장비점을 들러보았다. 데저트락 스포츠(Desert Rock Sports)라는 곳인데 규모가 작고 생각보다 기념으로 살만한 것은 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중고 물품을 파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 기념으로 레드락 볼더링 가이드북을 사려고 했지만 곧 2023년 개정판이 출시할 예정이라 현재는 재고가 없다고 했다. 대신 현재 버전을 대여할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현동 군이 저번에 레드락을 방문했을 때 구매한 것이 있었다. 나와 정록 군은 스킨케어 제품에 관심이 있어서 한참을 고민하다 라이노(Rhino) 크림을 구매했다. 왠지 이번 여행에서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날은 레드 스프링(Red Springs)으로 가서 레드락의 유명한 V10인 The Red Wave를 시도할 계획이었다. 한번 가본 적이 있는 현동 군이 운전을 해서 갔는데, 전에 갔을 때랑 다르게 Red Rock Canyon Fee Station을 지나가야 했고 입장료도 15불인데다가 예약을 하지 않아 진입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야 했고 조금은 이르지만 레드락에 있는 또 다른 유명한 루트인 Wet Dream이 있는 블랙 벨벳 캐니언(Black Velvet Canyon)으로 향했다.

가이드북을 보면 어프로치 정보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기본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 전 3km 정도 오프로드(비포장)를 가야 한다는 말에 긴장했다. 시내에서 40분 정도 운전하니 블랙 벨벳으로 가는 오프로드가 나왔고 차체가 높지 않은 렌터카이기에 천천히 3km를 갔다. 마침 이곳에서 트레일 러닝 행사가 있는지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지나쳤다. 몇 번의 크럭스가 있었지만 큰일 없이 도착했고 서둘러 어프로치 준비를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아래 볼더가 몇 개 보였고, 그곳이 에어리어의 시작인 듯했다. 생각보다 가까워 보였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볼더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렇다. 뒤에 있는 산이 말도 안 되게 커서 거리를 측정하는 뇌가 고장 났던 것이다. 

그렇게 20~30분 정도 걸어서야 첫 볼더에 도착했고 마침 등반을 하던 커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패드를 내려놓고 등반할 준비를 했다. 먼저 등반을 하던 남자는 이 볼더가 Twin Towers라고 알려주었고 Freedom Fighter라는 루트를 추천해 주었다. 혹시 쉽게 한다면 싯 스타트(Sit Start) 버전도 있으니 도전해 보라는 말을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곳 블랙 벨벳의 바위는 어제 갔던 크래프트와는 조금 달랐다. 크래프트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홀드들이 전체적으로 닳아 있었고 미끄러운 것도 있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컷 홀드가 많았는데 이곳은 비교적 프릭션이 좋고 오픈 그립 위주의 루트가 많았다. 어프로치가 힘들고 루트의 전체적인 그레이드도 높은 편이라 그런지 왠지 조금은 마이너 한 에어리어 같았다. 소위 고인물들이 모이는 곳이랄까? Freedom Fighter는 V5로, 보통 3번 안에 할 수 있어 워밍업으로 하기에 적당한 그레이드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크래프트와는 조금 다른 홀드 성격에 살짝 당황하며 모든 홀드를 신중하게 잡아야 했고 엄살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올랐다.

그 와중에 선교 군은 카메라를 설치하러 왔다 갔다 하다 선인장에 찔렸는데 옷에 붙은 것을 떼어내다가 손가락 끝에 부러진 가시가 박혀버렸다. 한참을 가시와 씨름을 하다 결국 빼낸 것인지 찾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등반을 이어 나갔다. 여담으로 이날 밤에 숙소로 돌아가 확인해 보니 가시가 박혀있었고 셀프 제거 수술을 했다.

그렇게 워밍업을 하고 서둘러 더 안쪽으로 어프로치를 해서 전날 찾아본 The Fountainhead라는 볼더를 찾아갔다. 사실 많은 영상을 찾아봤는데 이 루트가 쉬운 V9이라고 판단했고, 1시간 내로 끝낸 다음 블랙 벨벳의 하이라이트인 Wet Dream(V12)과 전설적인 루트인 Sleepwalker(V16)를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The Fountainhead는 결코 쉽지 않았고 이때부터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스타트 동작의 감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그 후 모든 동작들이 미국 사람들에게도 꽉 차는 정도였기 때문에, 나와 정록 군은 그 동작들이 너무나도 버거웠고 결국 아예 다른 베타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모든 힘을 다 쏟고 저녁이 돼 어두워지고 나서야 베타를 찾았지만 복병은 맨틀링이었다. 스타트부터 해서 처음으로 맨틀링 동작을 하게 됐는데, 왼발을 딛고 푸시를 해서 반쯤 일어난 후 홀드를 찾으려 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헤드 랜턴은 소용없었고 밟고 있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추락을 했다. 더 이상 등반할 힘도 없고 시간이 늦어 마무리를 했다.

그래도 하산 전에 가까우니 구경이라도 하자고 해서 Wet Dream 볼더를 찾았고 영상에서 본 것과 달리 엄청난 크기와 각도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곳에는 세 명의 클라이머들이 있었는데 모두 엄청난 실력자 같았다. 그 친구들에게 Wet Dream의 베타 설명도 듣고 레드락의 다른 V10급 루트들을 추천받고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하산했다. 이곳 블랙 벨벳은 어프로치가 힘들지만 이번 여행 중 한 번은 더 올 것 같았다. 그때는 반드시 이 The Fountainhead를 리벤지 하리라 마음먹었다.

등반 일지 - 13일 일요일

전날 먼 곳을 다녀와서인지 어프로치가 편한 곳을 가고 싶어서 게이트웨이 캐니언(Gateway Canyon)을 가기로 했다. 크래프트의 끝과 이어져 있어 평지인 크래프트를 질러가면 금방이다. 분명 계획은 그러했는데… 크래프트에 거의 도착할 때쯤 현동 군이 “어? 레드 스프링이 여긴데?” 하면서 갑자기 핸들을 틀어버렸다. 어제 Wet Dream 볼더에서 만났던 친구들에게 ‘레드 스프링을 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는데, 사실은 우리가 레드 스프링의 위치를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첫날 이곳을 지나갈 때는 밤이라 어두워서 못 봤던 것 같다. 그렇게 갑작스레 목적지는 레드 스프링으로 바뀌었다. 이따가 게이트웨이 캐니언을 가긴 할 거라 우리는 빠르게 Red Wave가 있는 쓰나미 볼더로 직행했다.

쓰나미 볼더

쓰나미 볼더는 어프로치 약 5분 정도로 가까웠으며 주차장에서 보면 저 멀리 보일 정도였다. 도착하니 어느 할아버지께서 혼자 볼더링을 하고 계셨다. 사실 이 볼더에 The Red Wave만 보고 왔지 다른 루트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여러 루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할아버지는 오가닉 점보 패드 두 장을 매고 내려가셨다. 우리는 먼저 The Offering Scam(V2)이라는 루트를 골랐다. 가이드북에는 싯 스타트로 하면 V3라고 되어 있어서 모두 싯 스타트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크래프트와 인접한 곳이라 그런지 바위 성격은 비슷했다.

아까 할아버지가 하고 계시던 The Prayer(V5)는 스타트 왼손이 역방향인 것이 까다로운 것 외에는 어렵지 않았다. 딱 스탠더드 한 V5로 몸풀기에 적당했는데 플래시를 하려고 조금은 힘을 썼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플래시 최고 그레이드를 경쟁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V10 루트를 처음 시도할 때도 플래시 하겠다는 허세도 부렸다.

The Prayer, 스타트 왼손 홀드가 좋지 않다. 클라이머 이정록

그다음 옆면에 있는 Amazing Grace(V4)는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스타트 쪽 홀드가 깨져서 조금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방금 했던 The Prayer보다 홀드는 좋지만 살짝 과감하게 던져야 하다 보니 연속 등반으로 손이 아픈 탓에 더 어렵게 했다. 사실 참을 수는 있지만 V4에 진심을 담기란 쉽지 않다.

드디어 유튜브로만 보던 The Red Wave로 패드를 옮겼다. 정말 안 좋은 스타트 홀드에서 뛰어 삼각형의 인컷 홀드를 잡는 동작이 크럭스이자 전부이다. 홀드의 성격과 각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동작 짜리 루트라는 점이 진안에 있는 사이드 탱크(V11)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접근성이 좋고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시도 해오던 루트라 그런지 홀드가 비교적 닳은 느낌이다. 현동 군이 전에 이곳에 왔을 때 혼자 시도해 본 경험이 있었는데, 스타트에 붙는 것조차 어려웠고 그 연장선에서 뛰는 동작을 만들어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스타트 홀드를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왼손은 아마 8mm(1/3마디) 정도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검지와 중지를 올리고 그 옆에 엄지를 붙여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오른손은 반 마디 정도 잡히는 홀드였는데 나는 엄지를 아래로 내려 핀치 그립으로 잡는 것을 택했고, 다른 친구는 엄지를 옆으로 잡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도가 있어서 컷이 없는 이 홀드들을 잡고 발을 떼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튜브에서 본 대로 양발을 전부 아래 좋은 곳을 밟고 뛰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멀어서 많이 뛰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오른손 타겟팅이 어려워서 이게 되는 걸까 싶었다. 여기서는 내 길이가 짧은 편에 속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중 여성 클라이머가 사용하던 발 홀드가 기억나 오른발을 바꿔보았다. 조금 안 좋지만 신경 써서 밟으면 뛰기에는 더 좋았다. 그렇게 발 홀드를 바꾸고 몇 번 뛰었을 때 오른손이 한 번 걸렸는데 잡을 줄 몰라서 당황한 탓에 손을 놓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거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충분한 휴식을 한 뒤 두어 번 더 던졌을까? 오른손이 세 손가락이 정확하게 꽂혔고 침착하게 맨틀링까지 이어가 루트를 오를 수 있었다.

The Red Wave, 클라이머 한태훈

여행을 오기 두 달 전 오른손 약지 A1 활차 부상을 당했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미국 등반을 하기 위해 한 달을 넘게 홀드를 잡지 않고 치료에 전념했었지만 다시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얼마 안가 또 다치게 됐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클라이밍을 완전 쉬는 것보다는 약한 강도로 해서 어느 정도 등반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몸을 준비했다. 그렇다 보니 솔직한 마음으로 이번 여행에 V10 이상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Red Wave를 올라서니 순간 얼떨떨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옆에서 응원해 주는 친구들의 환호성에 정신을 차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 루트는 잠시 동안 잊고 살았던 내가 클라이밍을 하는 이유를 상기시켜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은 더 이상 해가 들지 않고 삼각대가 쓰러질 만큼 강풍이 불어 우리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원래 가기로 했던 게이트웨이 캐니언으로 가기 위해 크래프트의 마지막에 있는 Monkey Bar 볼더에 패드를 내려놨다. 첫날 갔던 Angel Dyno 볼더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바로 Monkey Bar Direct(V8)를 시도했고 친구들은 금방 완등했으나 심한 오버행에 취약한 나는 손에 피가 나면서 포기했다. 이때 거의 이날 등반을 마칠 생각이었으나 옆면의 페이스에 있는 루트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재미있게 하길래 구경을 하다가 같이 하게 됐다.

Monkey Bar Direct, 클라이머 조선교

Hyperglide(V5)라는 루트인데 상당히 높은 볼더지만 크럭스는 중간쯤 있었고 랜딩도 아주 좋았다. 크럭스 동작에서 계속 실패하면서 발 자리를 찾던 중 홀드가 깨진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깨진 흔적이 너무 명백해 보였으나 일단 다른 홀드를 써서 아예 다른 동작으로 해결했다.

Hyperglide, 클라이머 한태훈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져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게이트웨이 캐니언 쪽으로 가는 것은 그만두고 다시 크래프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높지만 가이드북 별 4개짜리인 Vino Rojo(V6)를 시도했다. 사실 좀 더 아래서 시작하는 Big K(V8)를 해보려 했지만 당시 몸 상태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슬로퍼 홀드로 점프 스타트 해야 하는데 나와 정록 군에게는 너무 높아 패드를 한 장 더 깔고 시작해야 했다. 아래에서 봤을 때도 안 좋아 보였던 발 홀드는 매달리니 그냥 면을 딛고 있는 정도였다. 중간 부분을 지나 탑 아웃을 위해 상단 홀드를 더듬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내려왔다. 다른 바위에 올라가 랜턴을 비추며 찾아봐도 너무 안 좋아 보였다. 그 너머에 좋은 홀드가 있는 것 같았는데 역시나 가이드북 설명을 보니 키가 크면 조금 쉬울 거라고 쓰여 있었다. 몇 번의 시도 후 직등으로 오르는 것은 힘들 것 같아 살짝 옆으로 도는 베타를 시도했고 모두 완등할 수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완등 후 옆면으로 내려오는 게 더 무서웠다. 몸을 뒤로 돌려 바닥에 엎드린 후 내려와야 하는데 좋은 홀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완등해서 내려와야 했던 정록 군은 2분 넘게 걸렸다. 그렇게 이날도 불태웠으니 다음날은 설렁설렁 휴식 등반을 하기로 하고 마무리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