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 BREAK

언차티드 라인 #1, 동해

Thursday, November 14, 2024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햇수로 18년째 등반하면서, 누군가에게 듣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봤던 바위 대부분을 기억한다. 그런 것 중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것들이 가끔 어느 날 문득 떠오르곤 한다. ‘지금 그 볼더는 할 수 있나?’ 궁금해하며 정보를 찾아본다. 하지만 이런 언차티드(미지의) 라인은 찾기 힘든 게 대다수다.

며칠 전, 잊고 있던 북한산성(럭키 볼더가 있는) 쪽의 볼더링 구역이 생각났다. ‘럭키(V12/13)는 유명한 볼더 아닌가?’라고 생각할 거다. 초입부터 럭키 볼더까지는 어림잡아 1시간 정도의 어프로치가 필요할 정도로 꽤 멀다. 사실 이 사이에도 개척된 볼더가 많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2009년 때 만들어진 가이드북(pdf 파일)이 있다. 드라이브에 고이 모셔 놓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열어보았다. 2007년부터 개척돼 100여 개의 루트가 있지만 내가 이것들을 시도해 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국립공원의 자연휴식년제 때문이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개념도. 4번이 'It goes like this(V6)'. 붙어 있는 P(프로젝트)가 럭키였을 것이다.
"공단은 탐방객의 집중 이용으로 극심하게 훼손된 탐방로 또는 희귀 동·식물 서식 지역으로 보호 필요성이 있는 곳을 선정하여 일정 기간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자연휴식년제를 시행하였다."
공단 홈페이지에서 특별 보호구역 현황을 알아보니 2026년까지 휴식년이라고 나와 있다. 휴식년이 끝나갈 무렵 다시 한번 보호 대상인지 조사한 뒤 더 이어갈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니 앞으로 2년 후에도 등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다른 여러 곳이 생각나지만 차치해두고 이번에 찾아본 곳은 강원도 동해에 있는 곳이다. 동해 쪽 볼더링은 양양 죽도해변을 제외하면 전무후무하다. 등반한 지 오래됐고 자연 볼더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원도 고성 ‘하이빌리지’라는 곳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폐쇄된 등반지이다(군사 지역이라는 이유로 알고 있다). 당시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폐쇄되어 아주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몇 번을 삼천포로 빠졌는가. 다시 이번에 찾아본 곳 이야기로 돌아오자.

오늘의 주인공은 ‘삽질(V10)’이라는 루트인데, 더자스(The Jas)에서 알게 된 윤주환이라는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됐다. 몇 달 전 업로드한 영상 속 볼더는 꽤 높고, 세지 않은 각도에 작은 크림프 홀드로 이루어져 있어 보였다. DM을 주고받아 어프로치 정보를 알아놨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지난 금요일 갑작스럽게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편도 3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 결정하는데 쉽지는 않았다.
중간에 들른 동해 휴게소. 날씨가 좋지는 않다. 알고 보니 전날 비가 왔었다고…

얻은 정보대로 창고 같은 곳 앞에 주차했다. 혼자이기에 짐도 많이 꾸렸다. ‘이렇게 메고 산행이라니…’ 주차한 곳부터 이미 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인적이 없기도 해서 조금 긴장됐다. 주환이가 근무하고 있는 강릉 클라이밍의 센터장님 말로는 대략 15분 정도 걸으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5분도 채 가지 않아 첫 번째 크럭스가 찾아왔다. 사방댐을 지나가야 하는 데 그냥 가기에는 발이 젖을 것 같았다. 그냥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건너갔다. 

혼자 등반하기에 짐이 많다.
첫 번째 크럭스, 사방댐.

그리고 시작된 본격적인 산행. 산사태가 있었는지 길 중간에 나무들이 길을 막은 곳도 있었다. 타 넘어가거나 아래로 지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등산길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길을 걸었다. 야생 동물이 나타날까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면서 걸었지만, 영상에서 봤던 나무 데크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안 되고 사람도 없고 해서 결국 하산을 결정했다. 주차한 곳으로 돌아오니 출발로부터 1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운전해 온 시간을 생각하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 크럭스, 나무 길막.
무슨 폐쇄된 등산로도 아니고... 조금 무서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강릉 클라이밍 센터장님과 통화할 기회가 생겼다. 찾는 길은 간단한데 초행길이면 어려울 거라고 하시면서 다음에 함께 가자고 해주셨다. 센터장님도 자연 볼더링을 주로 하신다며 동해 근방에서 개척하고 있으니, 나중에 초대해 준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새로운 볼더를 찾으러 갔다가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된, 나름 얻은 것이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비록 첫 번째 여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앞으로도 잊혀지고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라인을 찾고자 하는 의지는 충만하다. 오늘도 다음에는 어느 곳을 가볼까 고민해 본다.

그곳에서 발견한 바위. 오르기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