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 BREAK

꿈꾸는 클라이머만이 완등을 가질 수 있지

Monday, February 26, 2024

클라이머들은 소위 드림 루트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드림 루트란 자기 자신이 오르고 싶은 루트를 말합니다. “저 루트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다.” “저 볼더를 완등하는 게 클라이밍 인생의 목표다.” 같은 거죠. 하지만 아무리 자연 바위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도 드림 루트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결정한 사람은 드물 겁니다. 저 역시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대신 클라이밍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준 루트라면 있습니다. 바로 캐나다 스쿼미시에 있는 ‘드림캐처(Dreamcatcher)’입니다. 대학교 3학년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아리 회장이자 클라이밍 선수 친구가 보여준 동영상이 그 시작이었죠. 그 후로 틈만 나면 영상 속 레전드 크리스 샤마가 드림캐처를 등반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운동 전 영상 시청으로 모티베이션을 얻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마치 부스터라고나 할까요? 몇 년 전, 즐겨 보는 멜로우(mellow) 채널에서 지미 웹(Jimmy Webb)이 드림캐처를 등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해 업로드한 적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고 있던 가슴속 뜨거운 무언가를 찾은 기분이었죠.

지미 웹의 드림캐처. [출처: mellow]

그러다 문득 다른 클라이머들의 드림 루트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모르는 루트들도 많을 것 같고, 그것들을 알아가는 것도 재밌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몇몇 클라이머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해보면서 놀랍게도, 저와 같은 루트를 꿈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전혀 모르는 루트를 들려준 분도 계셨어요.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들으러 가볼까요?

이성수

@lee_sung_su99

제 드림 루트는 버든 오브 드림(Burden of Dreams, V17)과 알파인(Alphane, V17)이요. 리드는 드림캐처(Dreamcatcher, 9a/5.14d)가 있습니다. 아, 플로틴(Floatin, V16)도 해보고 싶어요. 좀 많은가요? 드림 루트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잖아요🙂 모두 다 너무 유명한 루트이고 라인도 예뻐요. 유명하니까 유튜브에 좋은 퀄리티의 영상도 많아서 내적 친밀감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점점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냥 나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어요. 저는 평소에 멜로우(mellow) 채널을 자주 봐요. 아주 강력한 클라이머들이 나오죠. 락도(ROKDO)라는 일본 채널도 재미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미국 비숍(Bishop)에 가서 지내는 동안 친구들과 함께 블루문(Bluemoon climbing)을 만들었어요. 미국에는 멜로우, 일본에는 락도, 그리고 한국에는 블루문! 이런 느낌으로요.

The Mandala, Bishop [클라이머: 이성수]

주수현

@mangojoosu

드림 루트에 대한 질문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올렸던 건, 한창 바위를 나갈 때 목표였던 진안 운일암반일암에 있는 발 없는 새(V6)와 Since1974(V7)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목표지 꿈은 아닌 것 같았어요. 다시 드림 루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죠. SNS에서 다른 사람들의 등반을 보면서, “저곳을 가보고 싶다”, “저기에 매달려보고 싶다”, “그래 내가 클라이밍을 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저곳일 거야”라는 생각 들게 했던 단 하나의 영상이 떠오르더라고요.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본 남아프리카 공화국 락랜드(Rocklands)의 라이노(The Rhino, V8)였어요. 나름 태국 크라비나 프랑스 퐁텐블로를 다녀오면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것들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좋은 기회에 좋은 등반을 하는 것은 인생에 자주 찾아오는 일은 아니기에, 락랜드에 가서 라이노를 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마 저곳은 이대로 평생 저에게 드림 루트로 남아있지 않을까요?

출처: sally._.97__ 의 인스타그램

Kinfolk, 구만산 [클라이머: 주수현, 사진: 구현석]

조선교

@gide_jj

제가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있을 당시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현지 친구의 등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A$AP Rocky의 Praise the Lord가 흘러나오면서 암마감마(Ammagamma, V13)라는 루트를 등반하죠. 이어 등장하는 퍼즐 어바웃 빌리프(A Puzzle about Belief, V11)가 제 마음에 들어왔어요. 바위도 멋지고 등반도 멋지다는 생각에 이 루트를 꼭 완등하고 싶어졌죠. 제 클라이밍 인생 처음으로 등반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면서 그립의 타입이나 발 위치, 동작 등을 진지하게 공부했던 거 같아요. 당시 여름 즈음에 현지 친구들과 그램피언스(Grampians)로 등반 여행을 가면서 처음 붙어보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해서인지 어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크럭스 진입조차도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지금의 저에게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지역이 등반 금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갈 수도 없는 애증의 루트가 되었죠. 그곳이 등반 금지구역이 풀리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Praise the Lord는 지금까지도 프로젝트 등반할 때 듣는 루틴 곡입니다.

럭키, 북한산 [클라이머: 조선교, 사진: 이다선]

김보라

@lookatbora

드림 루트라… 특정 루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올라보고 싶은 곳은 있어요. 호주 태즈메이니아(Tasmania)는 모아이(The Moai)와 케이프 라울(Cape Raoul)이라는 등반지가 유명한데요. 그중 케이프 라울에 있는 토템 폴(The Totem Pole)을 올라보고 싶어요! 여러 가지 트레드 루트가 있죠. 사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태즈메이니아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저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제가 작년 2월에 태즈메이니아에 처음 갔을 때, 장기간 해외 등반 여행의 막바지라서 그런지 체력도 의지도 부족할 때였어요. 하필 로프도 한 동뿐이었고 토템 폴은 어프로치가 왕복으로 최소 8시간인 곳이라 엄두가 안 났죠. 그래서 모아이에서만 등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너무 아쉬운 나머지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모아이를 등반 중이다 [클라이머: 김보라, 사진: 이윤석]
태즈메이니아, 모아이 [사진: 이윤석]

김지우

@climb_626

클라이밍 시작하고 2년 차 정도 되었을 때 해외 등반에 관심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 캐나다에 있는 유명한 등반지인 스쿼미시(Squamish)의 호수를 배경으로 한 마제스틱(Majestic, V6)이란 루트를 보고 너무 멋져서 조사해 보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드림캐처(Dreamcatcher, 9a/5.14d)라는 루트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는 제가 리드 클라이밍을 하지 않을 때였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영상 속의 바위가 저를 압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중에 리드를 시작하고 다시 그 영상을 봤을 때, 레드 포인트로 오르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매달려서 동작을 다 풀어보는 거죠. 덕분에 매주 하는 지겹고 귀찮던 트레이닝은 설레고 기대되는 시간으로 바뀌었어요. 제가 올해 스쿼미시를 갈 예정인데, 이번에 가서 완등을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못하면 또다시 가면 되니까요. 제 몸이 완전히 준비가 된다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서 완등할 때까지 지낼 생각이에요. 늙어서 추해질 때까지 할 겁니다😂

Freaking, 불암산 [클라이머: 김지우, 사진: 조윤기]